개가 됐다. - 단편

개가 됐다. - 단편

들어와 0 386

새하얀 셔츠에, 검정색 핫팬츠, 짙은 색의 스타킹을 신은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나오는 지하철 역에서도 눈부셨다.


내려오는 계단에서부터, 개표구에 교통카드를 찍고 사뿐히 통과하는 모습까지, 나는 단 한장면이라도 놓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눈으로 그녀를 쫓았다. 개표구에서 나온 그녀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이내 벤치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 손을 크게 흔들었다.

손을 흔드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잠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지 몰라 멍하게 앉아 있었다.

작은 키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온 그녀는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안녕?"


그녀의 경쾌한 목소리는 나의 주위를 빠르게 환기시켰다. 나는 간단히 그녀의 인사에 대답을 했다. 짙은 검은 머리, 위에 사뿐히 놓여있는 중절모와 새하얀 셔츠에, 길게 묶인 검정색 리본은 일을 마치고 부랴부랴 달려 온 나의 모습과 대비되어, 나의 어깨는 초라하게 움츠려 들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어느 지하철 역, 인도구분선에 서있으라는 그녀의 부탁을 어기고 누가 나올지 몰라 사람들 사이에 숨어 초조하게 담배만 피웠다. 담배를 피우며 나는 인파사이에서 그녀를 찾았다. 단정한 코트에, 가방, 수수한 차림의 그녀를 발견하고 나는 지금 내가 만나려고 하는 사람이 이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것을 보아 그녀도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인도구분선 중앙에 올라가 멈췄다. 그러자 그녀는 이내 나를 알아보았고, 우리는 빠르게 자리를 옮겼다. 그녀를 따라 가는 동안, 밝고 생기로운 그녀의 모습에, 생활에 찌든 나의 모습이 어울리지 않아 일정 수준의 거리를 뒀다. 가까이 다가가면 나의 초라한 모습과 삶의 고단이 그녀를 더럽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길을 나아갔다.


"99번 출구로 나가야 해."


음식점의 위치를 묻는 내게 그녀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지, 가서 어떤 메뉴를 주문해야 하는 것인지, 선택권은 애초에 나에게 없었다. 다만, 지도를 잘 볼줄 모르는 그녀에게 나는 길 안내 만은 해줄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딪히며 나아가는 지하철 역에서 99번 출구를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성큼, 걸어나갔다. 나는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그녀를 따라갈 뿐이었다. 걸을 때 마다 움직이는 그녀의 팔은, 그 자체로 완벽한 생기로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리를 재촉해, 나는 그녀의 옆에 섰다. 그러나 그녀는 길을 찾는 것에 관심이 있었을 뿐, 나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우리는 비교적 수월하게 99번 출구를 찾았다. 긴 지하상가를 지나 밖으로 나오니 밝은 해와 상쾌한 바람이 우리를 맞았다. 밖에서 보는 그녀의 모습은 더욱 눈부셨다. 오월의 햇빛을 받아 그녀의 스타킹은 더욱 다채롭게 빛났고 흰 셔츠와 그녀의 검은색 머리카락은 나의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녀는 밖에 나와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그 뒤를 쫓는 나의 걸음은 그녀보다 살짝 느렸다.

마음먹고 걷는다면 그녀의 앞에 서거나 그녀와 나란히 걸을 수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뒤에 있는 것이 좋았다. 옆에 서기에는 내의 행색이 너무 초라했고, 그녀 앞에 서서 가기에는 길을 모른 뿐만 아니라 자신감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앞장선다면 나는 그녀를 바라볼 수 없게 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동하고 있었다. 오월, 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이 공존하는 휴일은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내기 충분했다. 나는 붐비는 사람들 사이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이따금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목줄이 있으면 좋을 텐데.”


갑자기 걸음을 멈춘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고, 한쪽 눈이 감겼으며 귀여운 혀가 살짝 나왔다. 짓궂게 웃는 그 모습에 나는 그녀가 한 말의 의미도 생각하지 못하고 따라 웃었다.


사람이 많은 오월의 거리를, 그 인파를 그녀는 거침없이 헤쳐 나갔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목적지로 향하는 그녀의 모습이, 한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생동감이 느껴지는 그녀의 다리와 움직임에 맞춰 흔들리는 탐스러운 머리카락은 그녀에게 매료되기 충분한 이유였다.

작은 키에, 빠른 걸음. 자신의 뒤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앞을,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당당한 모습에 나는 내가 선망하는 대상의 명확성을 봤고 명확성에서 비롯된 감정은 거리의 인파만큼이나 다양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작은 몸집에서 비롯되는 분주함은 나에게 어떤 애절함을 느끼게 했다. 그녀의 뒤를 열심히 따라가면서 나는 뒤에서 그녀를 안고 싶었다.

와락, 하고 내 팔과 손이 그녀를 감싸 안으면 품에 들어오는 그녀의 몸과 탐스러운 머리카락은 나에게 이미 상상을 벗어난 하나의 현실인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따라잡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발걸음을 재촉해서 그녀를 따라잡고 나는 그녀를 팔을 잡았다. 나는 그녀가 당황하거나 놀라는 것을 상상했다. 그러나 뜨거운 나의 손이 그녀의 차가운 팔에 닿았을 때도 그녀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며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안고 싶어서라고 말할 수도 없었고 아무 이유 없이 잡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겨우 할 말을 찾아 대답했다.


“어디 가는 거야?”


“도착하면 알려줄게.”


간단하게 대답을 한 그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팔을 놓으라는 말은 없었지만 내 손은 스르르 풀렸다. 그리고 나의 위치인 것 같은 그녀의 뒤에서 그녀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용기를 내 그녀를 잡아봤지만 결국 뒤에서 안지도 못하고 의미 없는 말만 늘어놨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가 발길을 멈춘 곳은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한적한 음식점 앞이었다. 고풍스러운 간판에는 필기체로 Cafe Amicable이라고 쓰여져 있었고, 카페 안에는 많지 않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시내를 벗어난 한적한 음식점이라 그런지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보다 커플이나 부부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녀는 머뭇거리지 않고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음식점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과 다르게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다. 천천히 회전하는 샹들리에, 흔들리는 촛불, 시야를 차단하는 높은 칸막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특히, 한쪽 벽면에 장식된 채찍이나 철로 된 마스크는 음식점의 분위기와 맞물려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음식점의 종업원이 그녀와 나를 맞이했다. 종업원의 차림새는 음식점의 분위기와 달리 크게 독특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느 음식점에서 볼 수 있는 복장은 아니었다.

남자 종업원은 검정색 조끼에 다소 큰 나비넥타이가 인상적이었고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와 손질을 한 손톱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남자의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조심스러웠으며 되도록 자신이 들어나지 않게, 마치, 음식점의 일부인 것처럼 행동했다.

여자 종업원의 경우에는 남자 남자종업원과 달리 자신의 존재를 숨기지 않았으나 그녀의 존재감은 그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복장은 스커트만 바뀌었을 뿐 남자 종업원과 동일, 그러나 한껏 멋을 부린 머리와 치장되어 있는 손톱, 짙은 눈 화장은 오히려 그녀의 존재감을 떨어트리는 요소로 작용했다.

남자 종업원의 안내를 받은 그녀와 나는 칸막이로 외부와 완벽하게 단절된 공간으로 들어갔다. 남자 종업원은 그녀와 내가 자리에 앉을 때 까지 기다린 후, 능숙한 솜씨로 간단한 식기 세팅을 마치고 메뉴판을 건네줬다. 음식점의 분위기와 다르게 판매하는 음식은 일반 음식점에서 보는 것과 별로 다른 것이 없었다. 내가 메뉴판을 뒤적이고 있는 동안 그녀는 선택을 끝냈고 주문을 했다. 내 몫까지.


“잘 알겠지만. 너에게 선택권은 없어.”


힘이 잔뜩 들어간 어조로 말하는 그녀를 나는, 메뉴판을 들고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분명, 그녀가 선택한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선택권을 주지 않는 다는 것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종업원이, 주문을 확인하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메뉴판을 달라는 소리였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종업원에게 메뉴판을 다시, 건넸다. 메뉴판을 받은 종업원은 조심스럽게 나갔고 밖과 완전히 격리된 공간엔 나와 그녀만 남아있었다.

그리고, 왜 그녀가 나에게 선택권을 뺏어갔는지, 애초에 그녀에게 그럴 권리가 존재하는지, 생각을 해봤다. 그러나 그녀는 간단하게 나의 생각을 깨버렸다.


“아까 내 팔을 잡은 건 왜지?”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너의 뒷모습을 보며 안고 싶었다고 말하기엔 나는 용기가 부족했다. 적당히 둘러댈 말이 필요했다.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녀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본격적으로 체근하기 시작했다.


“손이 뜨겁던데?”


“그냥 너무 걸음이 너무 빨라서 그랬어.”


적당히 둘러댈 대답이라곤 이 정도 밖에 없었다. 이 정도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나의 머리가 나는 왜 달려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흐응.”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아래 위로 훑어봤다. 그녀의 시선은 날카로웠다. 귄위적이거나 강압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입술이 바짝 말랐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흘러갔을 뿐이었지만 그 잠깐의 시간이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아니 도대체 왜?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지자 자연스럽게 나는, 내 앞에 앉아 있는 저 작은 여자가 뭐라고 나를 이렇게 몰아붙이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한 번 시작된 의문은 꼬리를 물고, 확산되어 여러가지 갈래로 퍼져나갔다. 나는 누구며 왜 이 자리에 있는가. 내 앞에 있는 그녀는 누구이며, 나는 그녀를 왜 만나고 있는가? 물음이 증폭되자 생각은 좋지 않은 쪽으로만 흘렀다. 그냥, 지금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된다. 물리적으로 저렇게 작은 여자는 나를 막지 못한다. 나를 불쾌하게 만든 책임을 지게 하려면 그냥 물러나는 것으로는 끝낼 수 없다. 여기는 완벽한 밀실이다. 따위의 생각들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할 수록 그녀의 시선은 더 날카롭게 나를 파고 들었다.

식은 땀은 등줄기를 지나 이마에서도 맺히기 시작했지만 나는 손을 올려 땀을 닦지 못했다. 어쩐지 지금 움직이면 무언가 크게 잘못될 것 같았다. 내가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종업원이 그녀가 주문한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의 시선은 종업원에게로 옮겨갔고 그제야 나는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마음같아선 나는 종업원에게 절이라고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종업원이 능숙한 솜씨로 음식을 내려놨다. 그녀는 다시 나를 바라봤지만 조금 전의 날카로운 시선은 아니었다. 오히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화색이 돌 만큼 음식의 향기는 좋았지만 방금, 조금 전의 시선을 생각하면 그녀의 반응은 이질적인 것이었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인사하고 종업원은 다시 나갔다. 종업원이 나갈 때, 찰칵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무슨 소리인지 궁금해 할 겨를도 없이, 종업원이 나가자 그녀는 다시 나를 압박해왔다. 이번엔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팅이 되어 있는 나의 식기를 집어 자신의 자리로 가져갔다. 그리고 능청스럽게 다시 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뭐해? 안 먹어?”


찡긋. 나는 그녀의 말에 장난기가 섞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식기를 가져가고 음식을 먹으라니, 나는 마치 여우의 집에 초대 받은 두루미가 된 기분이었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식기가 필요한 것이 당연하다. 그것을 막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이런 논리를 펼치기 위해 나는 나의 식기 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녀는 나의 손을 치거나 음식을 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단지 무관심하게 말할 뿐이었다.


“앉아.”


특별히 고조된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무기력하게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자리에 앉아 그녀는 다시 말했다.


“먹어.”


이것은 분명 나에게 식기를 사용하지 말고 음식을 먹으라는 의도가 분명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고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도구가 없이 식사를 하고 싶지는 않아.”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시선조차 없는, 차가운 무시였다. 그녀는 나를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식사를 했다. 음식을 먹는 그녀의 모습은 때론 귀엽고 때론 우아했다. 능숙하지 못한 칼질, 어색하게 잡은 포크는 그녀의, 영락 없는 20대 초반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한 손으로 음식물이 떨어지는 것을 받치는 모습이나 음식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모습은 아름다울 만큼 우아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은 지켜보는 사람에게 식욕을 느끼게 만들기 충분했다.

식사 시간이 지나기도 했고 주변에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이런 음식을 먹지 않고 버리는 것은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며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가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 모습을 힐끔 쳐다봤다. 그녀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쿵.”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음식을 집어 먹다 시선에서 그녀를 놓친 순간, 부드러운 그녀의 손이 내 머리를 눌렀다. 그녀의 힘이 세봐야 얼마나 세겠냐만은,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나는 음식이 담긴 접시에 힘없이 얼굴을 박을 수 밖에 없었다.


“개면 개 답게, 입으로 먹어.”


그녀는 나의 머리를 누른 상태에서 말했다. 손에 가해지는 힘은 그렇게 강하지 않았으나 어째서인지 나는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사람은 압도적인 힘이나 자연에 가까운 자연스러움에는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내 머리를 누르고 있는 그녀의 행동이 그랬다. 의문을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게, 마치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처럼 하나의 법칙 같은,

머리를 누르고 있는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내 머리를 떠났다. 그녀의 손은 내 머리를 떠났어도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시 그녀가 의자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식기를 잡는 소리, 음식을 입에 넣고 씹는 소리. 그녀는 나즈막하게 읊조렸다.


“먹어. 음식 아까워.”


의지와 상관없이 접시에 얼굴을 박은 채 입이 움직였다. 소스가 코로 들어가고 음식의 질감이 뺨과 코, 감은 눈을 통해 여과없이 전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은 맛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음식을 먹는 소리는 똑똑히 들렸다.


“언제까지 박고 있을거야? 얼굴은 들고 먹어.”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갈색 소스가 테이블에 뚝뚝 떨어졌다. 눈을 뜨고 싶지도 눈을 뜰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눈을 감은 채, 내 몫으로 준비된 음식을 천천히 먹었다.

나는 음식의 위치와 양, 그리고 간을 맞추기 위해 혀로 접시를 핥았다.

접시는 공허했다. 그만큼 배는 불렀다. 포만감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단순한 식사가 이렇게 힘든 것이었구나. 그녀가,


“얼굴 좀 들어봐.”


이제는 몸이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는구나. 고개를 들자. 그녀의 식기가 테이블에 내려지는 소리, 의자가 뒤로 당겨지는 소리, 그녀가 일어나는 소리, 또각또각 발 소리를 내며 내 옆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모두, 하나의 전주곡처럼 어떤 의미를 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잔뜩 긴장했다. 어디선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것은 인간이 느끼는 공포 중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얼굴에 냅킨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닿았다. 그녀는 냅킨으로 나의 뺨을 닦고, 이마와 눈, 코와 입술, 턱과 목 까지 꼼꼼하게 닦았다. 냅킨은 부드러웠으며 그녀의 손길은 간결했다. 나는 눈을 떴고 그녀는 이미 자신의 자리에 평안하게 앉아 있었다.


“처음에, 네가 멍멍이라고 짖었잖아.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했으면서, 막상 만나보니까 네가 생각하는 게 아니야?”


생각해보니, 그랬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랜덤채팅. 배가 고파 고기를 사달라는 나의 말에 그녀는 짖으라고 답했었고,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짖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만나 고기를 얻어먹었다. 처음엔 그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을 할 수 없었고, 고압스러운 어투로 대화를 하거나 명령을 하는 것도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만나서 보니 그녀의 생김새가 마음에 들었고 그녀의 이야기와 생동감 있는 표정은 가슴을 설레이게 했다. 그녀도 나에게 호감이 있어 보였고 나도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렇게 몇 번 더 만나다 보면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와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고, 키스는 언제 쯤 하면 좋을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나의 뇌내망상이었을 뿐이었다. 처음 그녀는 분명히 말했다. 자신은 남을 지배하는 것에서 희열을 느낀다고.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입술이 또 체구가 그렇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몇 번, 그녀를 만나면서 그녀가 말한 지배에 관해서 한 번도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녀는 몇 번이고 나에게 동의를 구했다.


“넌, 나의 개가 될 생각이 있어?”


그 때마다 나는 별 생각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성의 없이 그럴 생각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와의 관계는 연인으로 발전하지도 그렇다고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도 않았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였지.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었다.


화난 목소리로 나를 꾸짖는 그녀에게 나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혀로 핥은 접시가 생각보다 매우 깨끗해서,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어, 너 잘 먹더라.”


내가 접시를 보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그녀가 말했다. 처음보다 많이 누그러진 목소리였지만 냉랭한 기운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자 종업원이 들어와 자리를 치웠다. 입고 있는 옷 군데군데 소스가 튀어 묻어있을텐데 종업원은 내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정리를 하고 음식점을 나오는 길에, 살짝 둘러보니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거나 옷이 더러워진 사람들이 이따금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온 그녀와 나는 다시 걸었다. 나에겐 정신적으로 충격적인 한바탕 소동이 있었지만 밖으로 나온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음식점에 들어가기 전과 똑같은 속도로, 똑같이 당당하고 생동감 넘치는 모습으로 걸었다. 어떻게 해야할까? 그녀와는 다르게 나는 음식점에서 나온 후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성큼,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에, 생경스러운 그 풍경에 나는 또다시 그녀에게 매료될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제 그녀가 던진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한 걸음 걸음마다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내 목엔 약간 헐거운 목줄이 있고, 가볍게 목줄을 잡은 그녀의 발걸음에 맞춰 움직이는 상황을 상상해봤다.

그것은 굴욕적이라기보다는 감동적이었고, 위태롭지 않으며 안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목줄로 연결된 그녀와 나를 상상하면 짧은 풀이 부족하지 않은 초원의 어린 목동과 그 목동에 자신을 맡긴 한마리 낙타 같았다. 서쪽 언덕으로 태양이 뉘엇뉘엇 넘어가고 있는 어느 초원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생경한 풍경 같았다.


그녀의 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5월. 도시에선 싱그러운 소스 냄새가 났고, 해는 지고 있었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녀의 작은 머리가, 가느다란 팔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살랑거렸다. 그녀의 그림자를 밟게 될까봐 나는 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그녀의 그림자에서도, 그녀의 생기가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내가 이상하게 되긴 된 모양이었다.

그녀 앞에서 인파는 파도처럼 갈렸고, 그 어떤 그림자도 그녀를 침범하지 못했다. 반면에 나의 그림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뒤로, 한없이 길게 뒤로만 늘어났다.


인파를 가르고 그녀와 내가 도착한 곳은 깔끔하고 세련된 외관을 자랑하는 모텔이었다. 나는 모텔 앞에서도 서슴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녀의 행동에 내심 놀랬다. 그녀는 뭇 남자들이 한 번 쯤은, 자신의 아래에 눕혀 놓고 머리에서부터 발 끝까지 핥고, 탐하고, 만지고, 안고 싶어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모텔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나에게 상당한 흥분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아, 드디어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 나는 서둘러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고백하자면 내 목적은 처음부터 이거였다. 수단과 방법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안아 내 아래 눕히고 그녀의 하얀 살결을 탐하고 싶었다. 내 아래 누워있는 그녀의 몸과 수줍은 듯 나를 올려보는 그녀의 눈, 시선. 이런 타이밍에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사소한 것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아, 드디어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 나는 서둘러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고백하자면 내 목적은 처음부터 이거였다. 수단과 방법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안아 내 아래 눕히고 그녀의 하얀 살결을 탐하고 싶었다. 내 아래 누워있는 그녀의 몸과 수줍은 듯 나를 올려보는 그녀의 눈, 시선. 이런 타이밍에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사소한 것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나의 마음을 알 수가 없는 그녀는 모텔 안에서도 망설이지 않았다. 계산을 하고 키를 받고 엘레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나와 그녀는 9층으로 향했다.


나와 그녀는 901호 앞에 섰다. 모텔의 각 객실마다 고유의 번호를 크게 새겨 놓고 있는 문이 특이했다. 1에서부터 12까지 나열돼 있는 객실 중 나와 그녀가 멈춰 선 곳은 11이라는 글씨가 크게 새겨져 있는 곳이었다. 그녀가 카드 형식으로 된 키를 문에 가져다 대자 911호의 문이 열렸다. 그녀가 먼저 들어갔고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모텔의 문이 잠겼다.

모텔은 외관과 비슷하게 깔끔했다. 은은한 조명과 검정색 대리석 벽, 그리고 하얀 침대 시트가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신발을 벗고 그녀는 침대에 앉았다.


“짖어봐.”


다리를 꼬고,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그녀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분명, 그녀가 원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를 것이다. 이쯤에서, 그녀의 페이스에 말리면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왜?”


나는 최대한 불량한 포즈로 그녀의 앞에 서서 말했다.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었다. 그러나 다리를 흔드는

행동은 하지 못했다. 음식점에서 그녀에게 받은 데미지가 아직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나의 대답에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몸이 편하면 기어오른다니까!”


목청 높여 지르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말을 하고, 음식점에서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훑었으면 아마 나는 나도 모르게 짖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택한 것은 이질적인 카리스마나, 자연적인 권위가 아니라 폭력이었다.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온 그녀는 뺨을 때리려는 듯이 한 쪽 손을 들었다. 가는 그녀의 팔이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왔고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의 팔을 잡았다.

내가 그녀의 팔을 잡자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나와 만나는 동안에는 시종일관 자신감과 능숙함이 배어 있는 표정이었는데, 그녀의 손이 나에게 잡히자 적잖게 당황을 했다. 아, 그녀도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하는 짧은 감상과 함께 나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그대로 침대로 밀었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당황한 그녀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무기력하게 침대로 쓰러졌다.

나는 침대에 쓰러져있는 그녀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녀의 양팔을 제압하고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그녀는 팔에 힘을 주어 벗어나 보려는 듯 발버둥을 쳤지만 성인 남자의 힘을 작은 여자가 이기기는 쉽지 않았다.다리를 흔들고, 봄을 비틀어 벗어나려는 시도도 했지만 그럴 수록 그녀의 팔을 잡은 나의 손엔 더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소리를 지르거나 나에게 비키라고 소리치지 않았다. 그녀의 팔을 내려 다리로 눌렀다. 내 팔과 손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고, 그녀의 목과 새하얀 셔츠의 단추를 풀렀다. 셔츠 안에는 그녀의 앙증맞은 가슴이 흰색 브래지어 안에 감춰져 있었다.

내 심장은 이미 폭발할 만큼 두근거렸다. 그리고 다른 한 쪽은 이미 폭발하여 그녀의 배를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상의 것은 쉽게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그녀의 가슴을 만지지도 브래지어를 벗기지도 못하고 흥분한 그 상태로 그녀의 가슴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대로 그녀의 브래지어를 벗기고 짧은 핫팬츠를 벗기고 스타킹은 찢어버리고 그녀의 당황한 얼굴을 보면서 멋대로 내 흥분을 풀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선가 내 몸과 머리 혹은 마음이라고 불리는 그 어느곳에선가 막혀버렸다.


행위에 대한 처벌이 두려운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것은 평화롭고 이상적인, 관계에 대한 욕망이었다. 어린 목동이 자신보다 열 배는 큰 낙타를 모는 풍경이었고, 버려도 버려도 돌아오는 충견의 울음이었다.


흔들리던 그녀의 눈동자에서 이윽고 눈물이 흘렀다. 내가 생각하기엔 그것은 두려움이나 겁에 질려 나오는 눈물은 아니었다. 믿었던 관계에 대한 배신이, 쌓고자 하던 신뢰의 붕괴가 주는 슬픔.

혹은, 어찌할 수 없는 불합리한 폭력 앞에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이 분해서 흐르는 눈물이었다. 그녀의 눈물을 보자 내 몸을 지배하던 원초적인 욕망의 불씨가 서서히 꺼졌다. 흥분이 가라앉았다. 나는, 나의 혀로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핥았다. 그리고 그녀를 잡고 있던 나의 몸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엎드려 나는 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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